김빈길 장군
공(公)은 낙안의 낙생동(樂生洞) 지금은 옥산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힘이 장사였다 한다. 공(公)을 말하기를
이렇게 전하여 온다.
천자(天姿)에 영매(英邁)하고 기상(氣像)이 괴위(魁偉)했다. 어려서부터 큰 뜻이 있었고 열 살에 경사(俓史)에 도달했으며
스무살에 겸하여 무사(武事)를 익히니 훌륭한 덕(德)과 슬기와 용기에 군인(郡人)이 경복(儆服)하게 되었으며 매양 충효로
스스로 힘썼다.
홍무(洪武) 정축년에 왜구가 크게 도둑질하러 들어와 인근 여러 고을에 출몰하고 낙안에 침입하자 이들의 횡포에 백성이 놀라고
민심이 소란스럽자 이를 분하게 여기고 ⌜내가 도적을 처벌하지 않으면 백성들이 평안할 길이 없구나⌟ 말하고 의병을 모아 마을
사람들과 함께 남문밖에 주둔(駐屯)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하지 않았다. 공(公)은 여러 고을에 격문(檄文)을 보내니 평소
공의 위무(威武)에 감복한지라 일시에 많은 병사들이 모여 들었다.
공은 가재를 털어 크게 잔치를 벌리고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뒤 왜구들이 쳐들어 오니 ⌜나라에 신민(臣民)이
되어 감히 적을 무찌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자 많은 군사들이 그의 위엄과 덕(德)에 감복하여 팔뚝을 걷어 붙이고
함께 나가 싸울 것을 맹세하여 따르자 공(公)은 몸소 사졸(士卒)에 앞장서서 곧바로 적진에 뛰어 들어 왜구들을 바람 앞에
낙엽처럼 쓰러 뜨리니 군사들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였고 만여명의 적을 참수(斬首)하니 남은 적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이 사실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의 용맹을 가상히 여겨 갑주(甲冑), 절월(節鉞), 옥대(玉帶), 금은(金銀)을
하사(下賜)하시고 특별히 삼도수군 절제사(三道水軍節制使)에 제수되었다. 무인년에 다시 왜구가 쳐들어오자 공(公)은 또 군의
동쪽 멸악산(지금의 오봉산) 아래서 왜적과 싸워 수천명이 참수되고 멀리 경상도 사천(四川) 앞 바다까지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었다고 한다.
조정에 이 사실이 알려지자 왕께서 더욱 탄복하시고 큰상을 내리고 병조판서(兵曹判書) 검교정승(儉校政丞)으로
천직(天職)하시고 좌명훈(佐命勳) 기록하시며 칠성군에 봉(封)하셨다. 공(公)은 입조하시어 정직하게 충성을 다하였다.
양도(讓渡), 이공(李公), 천우(天佑)와 서로 친하여 서로의 힘과 마음을 합하여 왕실을 익대(翊戴)하며 여러 직책을 맡아
일하다가 사직하고 본군에 돌아와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토성(土城)을 쌓으니 곧 낙안읍성이다. 이로 인하여 왜구가 감히 넘보지
못하니 고을과 백성이 두루 편안했다 한다.
공(公)은 낙안의 백이산 밑 옥산(玉山)에 정사(情舍)를 짓고 퇴휴(退休)할 곳으로 삼아 망해당(望海堂)이라 이름하고
다음과 같이 글을 지었다. ⌜늦게 성조(聖朝)를 만나 국가의 은혜를 외람스럽게 입었네. 백의 티끌을 쓸어 버리고 금의(錦衣)로
환향(還鄕)해 뿌리의 남쪽 고을에 한 당(堂)의 풍경은 백이산의 바람이라네⌟
충신(忠臣)의 고절(高節)에 감동하고 옥산의 푸른 대가 군자(君子)의 유편(遺編)을 읊음도 또한 공(公)이 풍류에
홍장(紅帳)하였음을 알 수가 있다. 늘그막에 전북 고창으로 이주하였으며 다시 그곳에 왜구들이 침입하자 전북 홍진의
사진포(沙津浦)에서 노구를 이끌고 왜적과 싸워 크게 이겼으나 애석하게도 전사하였다. 왕께서 이 소식을 듣고 크게 슬퍼하시며
증의정부(贈議政府) 우의정(右議政)에 추증(追贈)하시고 시호를 양혜라고 하셨다.
※ 김빈길(金贇吉)장군은 낙안에서 출생, 조선 초기 왜구를 무찌르는데 큰공을 세운 장수이며 특히 낙안성(읍성)을 최초로
쌓은 분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