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업 장군
충민공(忠愍公) 임경업(林慶業)장군은
1594(선조27)~1646(인조24) 충청도 충주 달천에서 태어났다. 호는 고송(孤松), 자는 영백(英伯)이요, 본관은
평택으로 판서 정(整)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전쟁놀이를 할때도 스스로 대장이 되어 지휘하였으며,
그가 글을 배울 때는 고대 중국의 항우 장수가 문(文)보다는 무(武)를 배우라는데 큰 영향을 받았으며 끼니가 어려워도 좋은
화살이나 활이라면 모두 사 모았고 심지어는 입었던 옷을 벗어 주고 무기를 바꾸기도 하였다고 전해 온다.
1618년(광해10년) 23세에 무과에 급제 2년 뒤에 소농 본관이
되었으며, 1622년 첨지중추 부사를 지내고 31세 때 정충신의 휘하에 있으면서 이광 난에 출전하여 무악재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워 ⌜진무언 중공신⌟ 이 되어 우림장이 된 뒤 여수 돌산도 방답진 첨절제사를 거쳐 1626년 5월 낙안 군수로
부임하여 1628년 3월까지 선정을 베풀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자청하여 참전 좌장이 되어
전라병사(全羅兵使) 신경인과 함께 병력 3만을 이끌고 남한 산성에서 분투하고 있는 인조 대왕을 도와 청군을 물리치고자
강화도에 출전하였다. 그러나 왕이 이미 화친을 한 뒤였다.
낙안에 돌아온 임군수는 나에게 정병 4만만 있으면 오랑캐를 무찌르고
압록강에서 칼을 씻고 오겠다는 비장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그가 낙안에 와서 토서을 석성으로 개축했다고 하며 고읍
제1보를 쌓았으며 전라도 감사가 행하기 어려운 송사는 낙안 군수인 임경업에게 맡겨 처리할 정도로 명관이었다 한다.
그가 낙안을 떠날 때는 고을 주민 남녀 노소가 나와 10여리 길을
매워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고 한다. 공은 이렇듯 가는 곳마다 선정을 베풀어 그곳 백성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서민풍의 장군이기도 했다.
임경업 장군은 여느 장수와는 달리 능력이 출중함에도 당시 내외 정세
및 당쟁의 정치적 혼란으로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 불운의 명장이다. 1630년 평양 중군이 되어 검산성 용골성을
수축하였으며 1631년 충주 목사를 지냈으나 부친상을 당하여 사직하였다. 1633년 청북 방어사 겸 연변 부사에 기용되어
백마 산성과 의주 산성을 수축하는 등 성곽을 쌓는데 전문가이기도 하였다.
명나라 반도 공유덕을 토벌하여 명나라로부터 총병의 벼슬을 받았으며
이듬해 의주 부윤이 되고 청북 방어사를 겸하였으나 포로로 잡은 오랑캐를 석방하였다는 모함을 받고 파면되었다가 1636년
혐의가 풀려 의주 부윤에 복직되었다.
그 후 청나라가 명나라를 공격할 때 조선의 병력 동원을 요청하고
수군 장에 발탁되었으나 친명 배청 파인 임장군은 명나라에 이를 알려주었으며 화살촉을 빼고 탄환을 장전하지 않은 채 쏘아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였으며 1638년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안주목사가 되고 1640년 청나라 요청으로 단사장이 되어 명나라
공격에 나섰으나 이때에도 명나라에 기밀을 알려주다 체포되어 청나라에 압송 도중 탈출하여 양주 회암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으며, 1643년 명나라에 망명하여 명군의 총병으로 청나라 공격에 나섰다가 포로가 되어 18개월 간의 옥고를 치르고
청이 중국을 통일한 다음 대 사면령이 내려 풀려나게 된다.
이때 조선에서는 심기원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 그의 관련 설이
대두되어 1646년 인조의 요청으로 송환되어 친국을 받던 중 친청파인 김자점의 사주를 받은 형리에 의해 장살 당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왕도 아까운 인재를 잃음에 슬퍼하였으며 많은 백성 또한 슬퍼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임경업 장군이
타고 다니던 말도 주인이 죽었다는 소식에 따라 죽었으며 그가 죽은지 50년이 지난 1667년(숙종 23년)에 신원이
이루어져 복관이 되고 충주에 있는 충렬사에 배향이 되었으며 호는 충민(忠民)이다.
낙안 유림들이 낙안향교 옆에 충민사를 짓고 영정을 모신 후 매년
제향을 올리고 있으며 낙안읍성 내에 임경업 군수 선정 비각이 있다. (문화재 자료 4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