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립극단 [갈매기]를 보고
삼복 무더위에 과연 관객들이 있을까라는 우려를 불식시키고. 객석을 꽉 메운 관객들. 그나마 요즘 흔히 말하는 흥미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재미요소’로 범벅된 연극 장르도 아닌, 러시아 문호 체홉의 작품이라니.... [갈매기]는 그저 무심한 관조의 대상이었지만, 전주의 관객은 이 작품에 기대 이상의 관심을 가졌다. 그동안 전주시립극단이 세익스피어나 희랍비극 등의 작품성 예술성 위주의 명작시리즈를 계속 제공한 터에, 각기 다른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관립 두단체의 모처럼의 비교우위를 점칠 수 있는 기회로 나는 극장을 찾았다.
어느 도시를 가건, 과연 ‘극장’이 어디 있는가를 찾는다. 그 극장이라는 것은 통상 우리가 인식하는 필름이 돌아가는 영화관이 아니라, 인간이 무대에서 땀 흘리고 호흡하며 관객과 직접소통을 나누는 장소인-연극, 무용, 음악회 등이 열리는 무대가 상시 공연되는 밤이 존재하는 도시 말이다. 그런 극장은 예로부터 격식있는 복장을 갖추고 영화보다 훨씬 비싼 입장료를 내고서, 원님덕에 가족끼리 외식하는 나팔까지 부는 호사를 누리는 일을 발생시키는 근간이 되었다.
그런 극장에서 올려지는 공연문화(예술)는 적어도 인간 심리나 감성의 깊숙한 내면을 관찰하고 영유하며 융섭(interact)하는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어야 한다. 적어도 선인들은 그러한 행위(보여주고, 즐기는-제공과 수혜)를 ‘카타르시스(정화)’작용이라 일컬었고, 그런 시원한 감성의 경험은 극장 안이라는 공간에서나 가능할 일이다.
나는, 순천시립극단의 [갈매기]가 적어도 얼마나 많은 관객을 재울것인가? 라는 짓궂은 상상을 한번 해봤다. 전주의 관객은 적어도 연극이 대중화와 고급화의 인정을 이루던 80년대 초반부터 만드는 자들의 철저한 ‘관객교육’이랄까-정말 진지한(serious) 작품들로 승부를 걸어, 매번 서울서 내려오는 우스운 코믹연기가 대패하고 흥행에 실패해 되돌아가게 만드는, 연극적 고급도시로 만들고자 한 것이 사실이며 또한 그러한 작업은 지금 연극은 고급예술이라는 인식을 일반화 하게한 연극인들의 노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여담이지만, 그래서라도 전국연극제에서 유일하게 대통령상 수상을 다섯 번이나 한 도시가 유일하게 전주다. 각설하고,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여러 명의 첫 관극 경험자들(눈으로 봐서 대충 알아 볼 수 있다)이 상당한데, 작품이 진행되는 동안 객석은 너무 조용하다. 다 자나? 싶었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너무나 진지하게, 너무나 재미있게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관객은 솔직하다. 아니 솔직하지 못해, 재미없거나 수준미달이면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든지 술렁이기 마련이다. 그 페스트 보다 더 빠른 감정분출의 전염성. 나 같은 전문가가 알기에도 재미없을 것 같은 이 작품을 그리 진지하고 흥미롭게 감상하다니....
그것은, 이미 ‘의혹의 일시정지’ 라는 공연 감상자의 일반법칙(우리는 극장 안에 들어가면서부터 무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수긍하고 의혹을 떨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무대에서 죽는 연기를 보고서 저 배우는 진짜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다라고 항의 할 이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을 차치하고 라도, 배우의 ‘살아있는 연기’(우타 하겐의 설파는 매우 교과서적이다)를 보고서 감동하거나 그 상황에 빠져 들어가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하는 ‘큰 힘’의 작용을 충실히 순천시립은 해 내고 있던 것이었다. 여기에서 바로 ‘격(Quality)'이 거론되는 것이다. 역시 이 단체는 격을 알고 표출해 내는 단체이다. 관객의 감성과 감각을 쥐락펴락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증명하다는 것은, 이미 그 단체가 소속되고 거주하는 도시나 고장의 격을 대변하는 것이 된다. 바로 그렇게 그 단체가 그러한 격조의 작품을 만들어 내게큼 꾸준히 배려하여 작품을 숙성시키고, 작품성을 배가하고 성장할 수 있게큼 시민들이 봐 주었다는 것. 나아가 격려해 주었다는 것. 더 나아가, 고집스레 예술적 우위를 자긍으로 삼는 예술행정적 철학을 가진 그 누군가(예컨대 시장이나, 극장 운영자 등)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에 감사한다.
남도의 끝자락에 자리하며 인구도 그다지 많은 도시가 아닌 순천에서 온 촌단체가 뭘 하겠냐는 세간의 의혹을 일시에 깨뜨려 버린-쾌거에 나도 통쾌할 뿐이다. 따라서 연극전공학과의 학과장을 맡고있는 나는 첫날 공연을 본 후, 바로 비상연락망을 통해, 이튿날 전 학생이 관람토록 명령 아닌 명령으로 열띤 홍보를 해댔던 것이다. 심지어 그 다음날 리허설 시간에 빈 극장을 찾아 연습장면을 참관하여 다시 보았으니까.
다음날, 공연을 관람한 전공자나 비전공자(이웃 지인들)들 모두 너무너무 고맙다는 말을 전해 주었다. 모처럼 자신들의 감성적 무미건조함에 예술적 고품격의 소나기를 퍼부어 주게 한 배려에 감사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감읍할 뿐이다. 남도의 끝자락 순천이 이미 진한 장맛처럼 우러나는 예술적 메카로 거듭나고 있음을 나는 확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치열하게 싸우고, 다시 붙잡고 웃고 예술적 꼬리를 맞대며(영화 아바타에서의 교감을 그렇게 하더라) 촌음을 다투는 그들의 리허설을 보면서, 이곳의 관립단원에게 물었다.
“너희는 저렇게 치열하고 정치(精緻: 정교하고 치밀히)하게 연습해 보았느냐”고.....그는 고개를 가로 젖다가 이내 숙였다.
반갑다. 그리고 즐겁다.
묵은 배우들의 농밀한 연기와 수준 높은 배우술, 치밀한 연출력, 성의를 보여준 무대며 장치 의상들.....
계속 이러한 고급스런 순천이미지를 대내외에 펼쳐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관립단체는 조선시대의 기관(妓官)이 아니다. 영혼없이 몸으로 웃기고 옷자락만 서비스하는 수령의 하수인들이 아니란 말이다. 나는 이번 순천시립의 투어를 보고서, 아마도 전국의 애호인들은 순천의 예향으로서의 인정과, 시민들의 예술적 수준과 면모, 운영자들의 안목과 철학을 다시금 확인하는 결과를 주었으리라 믿는다. 그런 공연예술의 샹그릴라가 있다는 이 시대, 참 살만하다.
박 병 도 (전주대학교 공연엔터테인먼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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